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문단 편집) ===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 한편,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피아 제전]]에 참석했던 네로 황제는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접하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30번의 전투를 벌이고 20개 이상의 도시를 공략하는 등 탁월한 군략을 선보인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대 반란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장남 [[티투스]]를 참모로 삼고 진압에 나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프톨레마이스에 5개 군단 60,000명 내지 80,000명을 집결시켰으며[* 당시 로마군의 1/4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들 중에는 최정예인 제10군단도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쌓았던 그 군단이 맞다.],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아르메니아)|티리다테스]]가 선임되는 걸 받아들인 네로에게 보답하고자 40,000명에 달하는 궁기병을 파견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7년 봄, 갈릴리로 진군하여 요세푸스가 이끄는 반란군을 여러 번 격파했고, 요세푸스는 잔여 병력을 이끌며 갈릴리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도시였던 요타파타로 피신했다. 이후 47일간의 공성전에서 로마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베스파시아누스 본인도 발에 화살을 맞기도 했다.[* 이때 로마군은 요타파타 요새의 유대인 수비대를 상대로 160문의 노포를 배치하고, 투석기도 동원하여 포격했다. 이 공격이 인상깊었는지 요세푸스는 저서에서 "불덩어리와 화살이 얼마나 우박처럼 쏟아지던지, 유대 병사들은 방벽 위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고 적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수비대를 대상으로 한 로마군의 포격도 기록했다.] 그러다가 유대인 탈영병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보초가 자고 있는 때를 알리게 되었고, 로마군이 그때를 맞춰 급습하면서, 요타파타 요새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요세푸스와 40명의 동포들은 동굴로 피신한 뒤 제비를 뽑고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요세푸스는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요세푸스 문제|술수를 부렸는지]] 최후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되었고, 남은 한 명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항복하게 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당신은 로마 황제가 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일단 그를 포로로 잡아둘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후 로마군은 서기 67년 말까지 원정을 지속하여 요파, 티베리아스, 타리케아이, 그리고 가말라를 공략했다. [[갈릴리 호|갈릴리 호수]]에서도 로마군과 반란군이 수상전을 벌여 반란군이 대패했다. 갈릴리 정복이 완료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이사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한편 요세푸스와 함께 로마군을 대적했다가 패퇴한 기스칼라의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도주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열심당원들은 이미 성전을 점령하고 파니아스라는 경쟁적인 대제사장을 선출했다. 기스칼라의 요한은 열심당원들에게 다른 대제사장인 아나누스와 친구들이 예루살렘을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려 한다고 거짓으로 밝혔다. 이에 열심당원들은 분노하여 예루살렘의 남쪽 구역인 이두마에아에서 봉기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전역에서 유혈극이 벌어졌고, 아나누스는 죽임을 당했으며 그 시체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하지만 기스칼라의 요한은 곧바로 열심당원과 결별한 후, 자신만의 정당을 결성해 대립했다. 예루살렘에서 유혈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저들이 자기들끼리 죽이도록 내버려둬라" 라고 하며 예루살렘 공격을 최대한 늦췄다. 그는 예루살렘 주변의 지역들을 천천히 공략하며 유대 반란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그러던 68년 6월 9일, [[네로]] 황제가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자살했다. 황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후임 황제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후 로마 정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노령의 [[갈바]]와 젊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오토]]가 잇따라 제위에 올랐다가 피살당했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비텔리우스]]는 지극히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행보를 보였고, 그에게 반감을 품은 도나우 강 전선의 로마군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비텔리우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로마로 향했고, 장남인 티투스가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네 황제의 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